웰_치스 딸기_맛

2013. 12. 14. 12:15 from 0.1



  포르메노스는 완벽했다. 훌륭한 성채였다. 새로 쌓은 성벽의 벽돌들은 깨끗하지만 위엄이 있었다. 그 오랜 생명력 같은 덩굴이 타고 오르기 시작한 늙은 성벽보다 힘이 없지 않았다. 늙은 성벽이 겪었을 모든 경험도 포르메노스와 대결할 수 없으리라. 가장 신성한 이야기의 도시에도, 마지막에 꼽힐지언정 어깨를 들 수 있을 포르메노스여. 모든 새로운 성벽이 이런 명예를 얹고 있진 않으리. 이 성채 성벽의 힘들은 전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일진대. 성벽뿐 아닌 이 성채 곳곳에 아버지의 손길이 닿아있다, 놀도르 최고의 손길이, 페아노르의 손길이. 저기 보이는 저 철의 문도 그의 대장간에서 망치질을 받았던 문이라. 격렬한 평화가 깃든 포르메노스여. 완벽한 포르메노스여.


 다만 나와 동생이 완벽하지 않아서, 나와 동생이 성벽에 올라 바람을 맞는다. 마글로르는 현을 건드리며 노래를 하고, 나는 그저 곁에 앉는다. 동생의 노래가, 전에는 조부님 핀웨를 위한 것이었다가, 다음으로는 아버지 페아노르를 위한 것이었다가, 그 다음으로는 누구였던가. 지금에, 여기에 와서는 무엇이었던가.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은 다섯째이고, 조부님의 쿠루핀웨를 물려받은 것은 나였다. 재주가 못해도 사랑스러운, 페아노르의 첫아들, 당신의 첫손자. 너의 얼굴에서 쿠루핀웨가 보이는구나,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들었던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너의 얼굴 곳곳에 있단다, 눈에서, 코에서, 입술에서, 쿠루핀웨가 보인단다. 아버지가 쓸었던 것은 나의 붉은 머리였는데, 조부께서는 내 얼굴을 보셨구나. 마글로르가 말해주곤 했다. 자신이 조부님의 곁에서, 손을 잡고, 노래를 하고, 잠에 취하시는 것도 지켜보면서, 함께 불가에 앉았을 때, 조부께서 말씀하신다고. 우리 마에드로스, 마에드로스, 심장 아래 가슴이 커서 모두를 긍휼할 아이야, 마에드로스, 쿠루핀웨의 아들. 조부께서 말씀하신다고. 조부께서는 나를 보시고도 내 얼굴을 보셨구나. 쿠루핀웨의 아들.


 형님, 마글로르가 불러서 그만 성벽을 내려갔다. 성벽 위에서 마글로르는 노래를 했고 나는 그 노래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몰랐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방은 성벽과 멀지 않았다. 성채는 작지 않아서 나의 방이 여기 있게 되었다. 가장 가까운 형제는 마글로르. 그리고 아버지께는 복도 하나를 넘으면 곧 되었다. 창문을 열어두면 성벽 위에서 태우는 불이 보였다. 밤일지라도 날이 맑아 바람이 찬 날이면 성벽 너머 언덕 너머로 아주 작은 불 반짝이는 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보이면, 생각하기를, 멀지만, 티리온인가, 사이에 있는 것이 더 없으니. 티리온의 하나의 불인가, 티리온 여럿의 불이 모여 보이는 불인가. 이 거리에, 생각해보면 여럿의 불이겠지만 나에게는 하나의 불로 보인다. 거리가 멀어서, 거리는 멀지만 하나의 불로 본다. 방 앞 성벽의 불을 더 크게 짓고 싶게 하는 하나의 불.


 창을 열어두고 어느새 찬기운 든 의자에 앉았다. 창턱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듣는다. 복도를 끌던 발소리는 오래전에 멎었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복도 우측에서 문 닫히는 소리, 마글로르였으리라. 아이들 몇이 오가는 소리가 조금 나고, 정적으로 맺혔다가, 불꽃만이 선명해질 시간즈음 되어, 멀리 복도 너머 두터운 발소리가 쓸려가고, 큰 문이 닫힌다. 아버지였으리라. 오늘은 밤에 뵙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불이 장작을 태우는 소리만 들린다. 엎드려 귀만 세웠는 데서 야음 속에 불만 탄다. 야음 속에 불만 탄다. 반복적인 소리.


  「마에드로스.」

반복적인 소리, 까무룩했던 정신으로 부름을 들었다. 마에드로스. 부름이되 작은 목소리여서 귀가 섰다. 눈이 뜨여 고개를 들었더니 눈앞 창턱에 팔 두 개가 달려있다. 놀라서 보노라니, 낮지 않은 창까지 어찌 올랐는지 억센 팔을 창턱에 걸치고, 불 없이 어두운데 핀곤이 달려있다. 핀곤, 아니, 왜, 어떻게, 그 이름 끝을 붙잡아줄 틈도 없이 입 속에서 말이 마구 섞여 나왔다. 도막 도막을 알아듣고 핀곤이 싱겁게 웃었다. 그게, 마글로르의 노래가 너무 서글퍼서. 웃음은 싱거운데 말은 부족한 근거로도 실답다. 핀곤, 내가 그 이름을 재차 부르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들어가게 해줘, 이거 힘들다. 반사적으로 창턱으로 다가갔다가, 그의 손을 잡지 못하고 창문을 잡았다. 둥그렇게 구른 핀곤의 눈을 마주하다가 겨우, 겨우, 안돼, 말했는데, 힘들다더니, 팔 하나를 들어 내 손을 잡기를, 한 잔, 한 잔만…,

  「계피주 한 잔만 마시고 갈게.」

들어가게 해줘. 마에드로스.


 그렇게 마주보고 있다가, 그를 들였다. 한 병, 한 병만 딸 테니까. 창턱을 넘어와서는 옷을 털던 그가 또 웃었다.






_

마글로르의 목소리가 멀리까지 들린다는 걸 읽고, 마에드로스와 떨어진 핀곤이 마글로르 노래에 귀기울인다는,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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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숲울 :